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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야, 나도 그랬어!"가 최악의 위로인 이유 (feat. 수능 영어로 배우는 진짜 공감: 고3 25년 5월 34번)

by 키스톤에듀 2026.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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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런 경험 있나요?

너무 힘들어서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친구가 대뜸 이렇게 말하는 상황 말이에요.

"헐, 야 완전 내 얘기다. 나도 저번에 그랬잖아! 그때 내가 어땠냐면..."

분명 위로를 받으려고 이야기를 꺼냈는데, 어느새 대화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 친구로 바뀌어 버린 그 찜찜한 상황. 친구는 나를 이해한다고 한 말일 텐데, 왜 기분이 묘하게 더러울까요?

놀랍게도 수능 영어 지문이 이 미묘한 심리를 아주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가짜 공감''진짜 공감'의 차이를 파헤쳐 봅니다.


1. "나도 그랬어"의 함정: 공감이 아닌 '동일시'

우리는 흔히 누군가 슬픈 이야기를 할 때 "I feel for you. That happened to me. (마음이 아프네. 나한테도 그런 일이 있었어.)"라고 말하는 게 공감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지문에서는 이것을 동일시(Identification)라고 부르며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핵심은 바로 '주어의 이동'입니다. 친구가 자기 힘든 얘기를 꺼내면 감정의 스포트라이트는 당연히 '친구'를 비춰야 합니다. 하지만 "나도 그랬어!"라고 말하는 순간, 스포트라이트가 '나'에게로 확 돌아가 버립니다.

이것은 친구의 감정을 나누는 게 아닙니다. 친구라는 스크린에 '나의 과거 기억'을 빔프로젝터처럼 쏘아 올리는 단순한 투영(Projection)일 뿐이죠.

2. 착각하지 마세요, 그건 당신 감정입니다

지문은 아주 뼈 때리는 말을 던집니다.

"It is merely one’s own―imagined or remembered―emotional response."
(그것은 단지 상상되거나 기억된 '자기 자신만의' 감정 반응일 뿐이다.)

 

 

예를 들어볼까요? 친구가 "나 이번 수학 시험 망쳐서 죽고 싶어"라고 했습니다.
이때 내가 "아 알지, 나도 작년에 4등급 받고 엄마한테 쫓겨날 뻔했잖아. 그때 진짜 무서웠는데..."라고 반응한다면?

나는 지금 친구의 슬픔을 느끼는 게 아닙니다. 내 과거의 공포를 다시 끄집어내서 혼자 떨고 있는 거죠. 친구가 처한 상황은 까맣게 잊은 채 말입니다. 이걸 유식한 말로 '자아도취형 위로'라고 할 수 있겠네요.

과거의 나를 생각하고 슬픔을 느낌

3. 진짜 공감(Empathy)의 조건: '너'와 '나'의 분리

그렇다면 수능 지문이 말하는 진짜 공감(Empathy)이란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조건은

"Without losing sight of this being experienced by the other (이것이 타인에 의해 경험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 것)" 

입니다.

쉽게 말해,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는 겁니다.

  • 가짜 공감 (동일시): "매운 떡볶이 먹고 배탈 났어? 나도 배탈 나봐서 아는데 진짜 아프더라." (내 고통 기준)
  • 진짜 공감: "너는 매운 거 진짜 못 먹잖아. 네 입맛에 그 정도 맵기였으면 진짜 지옥 같았겠다. 평소보다 훨씬 힘들겠는데?" (상대방의 신념과 욕망 기준)

지문 마지막 문장이 바로 이 뜻입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욕망(beliefs and desires)의 세트를 장착하고 그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보는 노력. 그게 바로 진짜 공감입니다.


영어 vs 한국어: 사고방식의 차이

이 지문을 통해 영어와 한국어의 논리 전개 차이를 재미있게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1. 감정의 분석 vs 정서의 공유

한국어에서는 "아이고, 나도 그랬는데 맘 아프다"라는 표현이 정서적 유대감을 쌓는 '맞장구' 문화로 긍정적으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We)'라는 울타리를 중시하니까요.
반면, 영미권 화법(특히 이 지문과 같은 학술적 글)에서는 '나(Self)'와 '너(Other)'의 경계를 칼같이 나눕니다. 감정조차도 논리적으로 해부해서 "네가 느끼는 것과 내가 기억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라고 분석하죠.

2. 명사 중심(영어) vs 동사 중심(한국어)

원문을 보면 "Through identification (동일시를 통해)"처럼 추상적인 명사를 주어로 사용하여 논리를 전개합니다.
반면 한국어로 바꿀 때는 "우리가 누군가와 자신을 동일시할 때..."처럼 사람이 주어가 되어 동사로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영어는 '개념'이 움직이고, 한국어는 '사람'이 움직입니다.

3. 문장 구조의 차이

"forgetting that it is not you but the other who is in the situation"
(상황 속에 있는 건 네가 아니라 타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함)

영어는 'It is ~ that' 강조 구문을 써서 "네가 아니라! 바로 타인!"이라고 콕 집어 말하는 구조를 선호합니다. 한국어로는 "상황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는 걸 깜빡한다" 정도로 부드럽게 의역되지만, 영어 원문의 뉘앙스는 훨씬 논리적이고 대조적입니다.


요약: 오늘부터 쿨한 위로자가 되는 법

친구를 위로할 때 "나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면 잠깐 멈추세요. 그 순간 주인공을 나로 바꾸지 말고, 친구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세요.

"나는 괜찮아졌지만, 너는 지금 내 과거랑은 또 다른 상황이잖아. 네 입장에서는 어떤 기분이야?"

 

이게 바로 수능 영어가 알려주는 '찐' 공감의 기술입니다.